여자없는 남자들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불안한 미래 속 어제와 내일만 반복
오늘을 찾지 못하는 중년남성 그려
은근하고 말랑말랑한 비유와 묘사
양념처럼 적당한 액션·섹스 얹혀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340쪽, 1만3800원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하루키 '시간 요리'
소설가는 시간을 요리하는 사람이다.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현실의 시간을 흔들어 뒤집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을 저글링하는 묘기를 보였다가 때로는 피자 도우처럼 늘리는가 하면, 때로는 믹서기에 모든 시간을 한데 넣고 갈아버린다. 어떤 소설가는 시간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어떤 소설가는 시간을 망원경으로 관찰한다. 어떤 소설가는 아까운 한 뭉텅이의 시간을 휴지통에 버리기도 한다.
모든 소설가에게는 시간을 요리하는 자신만의 레시피가 있게 마련인데, 먹어도 먹어도 하루키의 ‘시간 요리’는 어째서 매번 맛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새롭지 않고 익숙한 맛인데, 지금까지 수십 번도 더 경험한 맛인데, 환갑도 넘은 하루키의 ‘시간 요리’는 왜 질리지 않는 것일까. 하루키의 신간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으면서도 나는 계속 군침이 돌았다. 어쩌면 요리의 질감과 온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루키의 소설은 뜨겁지 않다. 센 이야기를 센불로 볶아내는 법이 없고, 중불로 은근하게 끓이는 쪽이다. 적당한 온도의 유머가 있고,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무릎을 칠 수 있는 정도로만 참신하고 말랑말랑한 비유와 묘사가 있고, 적당한 액션과 적당한 섹스가 양념처럼 뿌려져 있다.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하루키는 두 개의 삶을 동시에 살고 있는 남자들을 자주 다룬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는 연기자다. “연기를 하면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있어. 그리고 끝나면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오지. 그게 좋았어”라고 말한다. ‘예스터데이’는 ‘자아가 둘로 갈라지는’ 기타루의 이야기다. ‘독립기관’은 ‘사랑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사랑을 잃지 않길 간절히 바라는’ 자기분열에 빠진 도카이의 이야기다. 대부분의 남자 주인공들은 중년이고, 갑자기 혼란스러워하며, 갑자기 삶이 바뀐다. 누군가 죽고, 누군가 떠나고, 누군가에게 배신당한다. 한때 하루키가 다루는 남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들이었는데, 이제는 (인생에 대해 뭔가 알게 될 줄 알았는데 결국엔) 아무것도 모르는 중년들이 되었다. 예전의 청년들이 인생이라는 기다란 화살표 위의 1/5 지점에 있었다면, 지금의 소설 속 중년들은 말 그대로 화살표의 절반을 지난 사람들이다. 걸어갈 길보다 걸어온 길이 더 길고, 자신을 관통한 시간의 궤적이 까마득하게 멀리 뻗어 있는 중년들이다.
인간은 과거를 돌아보며 왜 실수했는지 되짚어볼 수는 있지만 과거로 돌아가서 실수를 만회할 수는 없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우리는 계속 실수를 이야기해야 한다. ‘예스터데이’의 기타루는 비틀즈의 명곡 ‘예스터데이’를 자기 마음대로 번안해서 부르는데, 그 가사가 의미심장하다. “어제는/ 내일의 그저께고/ 그저께의 내일이라네.” 노래 가사처럼 중년은 현재를 살지 못하는 나이일지도 모른다. 가사에 ‘오늘’은 없다. 어제와 내일과 그저께를 왔다갔다 할 뿐 오늘을 노래하지는 못한다. 그저께는 대단한 내일을 꿈꾸었지만,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한 채 어제를 보내고 오늘이 되었다. 내일이 되면 아마도 오늘의 어제인 그저께를 그리워하면서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중년의 오늘은 영원히 찾을 수 없고, 시간의 화살 위에서 어제와 내일을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루키의 많은 소설들은 ‘예스터데이’의 번안 가사처럼 구성돼 있다. 불안한 내일을 앞두고 어떤 한 시절, 말하자면 어제와 그저께를 계속 돌아보는 이야기들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반짝이던 시절, 두근거리던 순간, 질투로 폭발하던 순간, 사랑하던 순간, 떨리던 순간, 새로운 게 막 시작되는 걸 느끼는 순간…. 그 순간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중년들이 계속 예스터데이를 부르고 있다. 소설 ‘기노’에서,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순간 곧장 집에서 뛰쳐나온 기노는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자신이 제때 상처받지 못했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 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란 알맹이 없이 텅 빈 중년들이고, 우리 내부에 오랫동안 살고 있던 ‘열네 살을 영원히 빼앗겨버린’ 남자들이다.
우리는 소설 속 시간 속에서 현실의 시간을 배울 수 있다. 소설로 미리 빼앗겨 봄으로써 실제로는 ‘알맹이’와 ‘열네 살’을 지킬 수 있다. 배우 가후쿠는 연기가 끝나고 나면 나 자신으로 돌아온다고 말했지만, 이렇게 덧붙인다. “싫더라도 원래로 되돌아와. 하지만 돌아왔을 때는 그전과 조금 위치가 달라져 있지. 그게 룰이야. 그전과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어.” 그것은 시간의 룰이기도 하고, 예술의 마술이기도 하다.
셰프 하루키의 시간 요리를 먹고 나면 자신이 ‘여자 없는 남자들’인지 ‘여자 있는 남자들’인지 알 수 있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었다면 그걸 받아들여야 하고, 여자 있는 남자들이 되고 싶다면 결정적인 감각과 정면으로 마주 앉아야 한다. 울고 싶을 때 울고, 화내고 싶을 때 화내고,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해야 한다. 어느 날 당신도 느닷없이, 갑자기,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될 것이다.
김중혁 소설가
김중혁은 1971년 경북 김천 출생. 2000년 ‘문학과사회’에 중편 ‘펭귄뉴스’로 등단. 김유정문학상·이효석문학상 등 수상. 소설집 『펭귄뉴스』 『1F/B1』. 장편 『미스터 모노레일』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산문집 『뭐라도 되겠지』 『모든 게 노래』 등.
[S BOX] ‘청춘’ 작가의 첫 중년 남성 이야기 … 일본서 30만부 예약 판매
『여자없는 남자들』(원제 : 女のいない男たち)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2005년 『도쿄 기담집』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단편집이다. 일본에서는 지난 4월 발간됐으며, 발간 전 선주문으로 30만 부가 판매될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한국어판 계약금은 약 2억 5000만원 수준. 『1Q8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등 최근 신작들이 국내 출판사들의 치열한 판권확보 경쟁 속에서 10억원 안팎의 선인세를 기록한 것에 비해 다소 적은 금액이다.
1949년생인 하루키는 그동안 청춘의 상실과 방황을 주로 그렸다. 1987년 발표한 『노르웨이의 숲』을 비롯해 『해변의 카프카』 『1Q84』등은 모두 성장통을 겪는 젊은이들이 주인공이었다. 『여자없는 남자들』은 그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중년 남성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그는 일본어판 서문에 “어째서 그런 모티프에 내 창작의식이 붙들려버렸는지(붙들렸다는 표현이 딱 맞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와 비슷한 구체적인 사건이 최근에 나한테 일어난 것도 아니고(다행스럽게도), 주위에서 실례를 목격한 것도 아니다. (…) 그것은 나라는 인간의 ‘현재’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일지도 모른다. 혹은 완곡한 예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하루키는 매년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수상 후보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2006년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이 한 번씩은 받았다는 체코의 프란츠 카프카상을, 2009년에는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