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역사 - 천주교에 대한 박해와 그 원인
박해하였다. 이러한 박해는 100여년에 걸쳐 수 차례에 걸쳐 일어났고 그 박해의 도화선은 각 사건마다
다르지만, 천주교를 말살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박해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천주교인들의 조선의 전통적인 예절인 조상제사를 거부했다는 점과,
정치적인 파벌, 혹은 서양세력의 진출에 대한 거부감 등을 들 수 있다.
번호 | 박해사건 | 결과 |
1 | 을사추조적발사건 (정조 9년, 1785) | 이벽의 가택감금, 김범우의 유배생활과 그 여파로 사망 |
2 | 신해박해(정조 15년, 1791) |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
3 | 신유박해(순교 1년, 1801) | 주문모 신부, 정약종 등 초대 교회지도자 순교 |
4 | 을해박해(순조 1년, 1815) | 경상도 교우 100여명 체포, 그중 30여명 순교 |
5 | 정해박해(순조 1년, 1827) | 전라도 교우 240여명을 포함하여 경상도, 충청도, 서울, 등지에서 500여명 체포당함. 그중 15명이 옥사 혹은 순교. |
6 | 기해박해(헌종 5년, 1839) | 전국적 박해, 정하상 등, 불란서 성직자 3명을 합하여 100여명 순교 |
7 | 병오박해(헌종 12년, 1846) | 김대건 신부 등 10여명 순교 |
8 | 병인박해(고종 3년, 1866) | 대원군에 의해 8,000 - 2만 여명 순교 |
9 | 제주도 교난(고종 3년,1901) | 일반민중에 의한 천주교도 학살 |
迫害의 원인은 儒敎 傳統的 兩班體制에 도전하는 그리스도교의 平等思想과의 갈등,
祖上典禮問題에 대한 견해차이, 당 파벌에 의한 정치적 상극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박해의 와중에서도 조선 교우들은 35년동안 즉 1801년 주문모 신부의 순교후 1836년 불란서 성직자들이 입국하기까지 성직자 없는 조선 교회를 이끌어 왔으며, 신앙을 전파하고 교회를 지켜왔다.
조선교우들은 북경주교와 교황청에 여러 차례에 걸쳐 성직자를 보내 줄 것은 요청하였고, 이러한 서한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모진 매를 맞고 순교까지 하게 되는 일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조선교우들은 1811년, 1825년 두 차례의 서한을 교황께 보냈는데 교황께서는 조선교우들의
딱한 사정을 받아들여 1831년에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초대 교구장에 파리외방선교 회원이었던 브뤼기에르 (B. Bruguière, 蘇) 主敎를 임명하였다. 이 조선교구의 설정은 그동안 조선교회가 북경 교구 주교의
관할에 들어간 1792년이래 만 40년 만에 독립하게 된 것으로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天主敎會의 敎區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는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임명을 받고 조선을 향해 가던 중 조선에 입국은 못하고 여행중 과로에 의해 병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외방선교회는 계속해서 성직자를 조선교구에 보내 주었는데, 1836년 모방 (Pierre P. Maubant)신부가 입국하고 이어서 샤스탕 (Jacques H. Chastan) 신부 그리고 제 2대 조선교구장이 된 앵베르 (Laurant M.J. Imbert 范世亨) 주교가 입국하여 주교와 사제, 신도들이 있는 교회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모방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된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소년들은 마카오에 1837년 6월 7일 도착하여 사제 수업을 받았으며, 그 후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상해 부근 김가항(金家港)에서 페레올(Ferréol) 주교로부터 司祭敍品을 받아 한국 교회의 최초의 방인 성직자가 되었다.
한편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 강남 교구장 마레스카 (Maresca)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아 두번째 방인 사제가 되어 조선 교회를 위해 그 후 12년 동안 많은 사목 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