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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고은 “詩人이 안됐으면… 난 아무짝에도 쓸모없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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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고은 “詩人이 안됐으면… 난 아무짝에도 쓸모없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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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82)은 아직도 소년이다. 얼굴이 해맑다. 맑은 눈엔 호기심이 가득하다. 그는 뭐든 진지하다. 놀이에 빠진 소년처럼 열중한다. 평생 그렇게 살았다. 단 한번도 회피하지 않았다. 현실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그렇게 질풍노도처럼 달려왔다. 그의 삶은 격류였다.

어릴 적 그는 약골이었다. 하루 종일 잠만 잤다. 헛것을 보고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가족들은 그가 숨을 쉬고 있는지 이따금 확인해 볼 정도였다. 게다가 수줍음을 많이 타 ‘암사내’로 불렸다. 여자아이들보다 더 부끄러움을 탔다. 집에 낯선 손님이라도 찾아오면 얼굴이 빨개져 달아났다.

“난 커서도 사람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상대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으레 시선은 딴 쪽을 향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 천관우 선생(1925∼1991)한테 된통 혼이 났다. ‘왜 사람을 앞에 놓고 사시(斜視)로 보는가? 난 인간모독을 당하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네. 앞으로는 정시(正視)를 하게, 정시를!’ 천 선생 목소리가 얼마나 우렁우렁한가. 그 이후부터 조금씩 고치게 됐다. 대중 강연도 그때부터 하게 됐다. 그전엔 정면을 바라보며 강연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30대 초반 제주에서 몇 년 살 때 어느 학교에서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아침조회 시간이었는데, 교장선생님은 ‘서울에서 오신 유명한 시인’이라며 아이들 기대를 잔뜩 부풀렸다. 전날 70여 장의 원고를 몇 번씩 읽으며 숙지했기에 자신 있었다. 하지만 한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 자신이 허허망망 허공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아이들은 이제나저제나 침을 삼키며 내 강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난 교단을 내려와 냅다 정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와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얼마쯤 달렸을까. 내 뒤를 쫓아온 사람이 있었다. 교장선생님이었다. ‘강연비용은 이왕 나온 것이니 받아 가시라’며 흰 봉투를 내밀었다. 그때 난 술값이 떨어져 궁한 시절이었다.”

1949년 중 3 어느 날, 고은은 자신의 영혼에 송두리째 불을 지른 ‘일대 인연’을 만났다. 하굣길에 우연히 ‘한하운 시초(정음사)’라는 시집을 주운 것이다. 집으로 오자마자 밤새 그 시집을 읽고 또 읽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의 ‘전라도길’은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벼락이었다. 가슴이 벅차 빠개질 것만 같았다. 감격과 아픔에 마구 울었다. 고은은 그 즉시 ‘한하운처럼 문둥병자가 되리라’고 다짐했다. ‘그처럼 떠도는 시인이 될 것’을 맹세했다.

6·25전쟁이 터졌다. 지옥이었다. ‘감수성 덩어리’ 고은을 한순간 폐허로 만들었다. 좌우익간의 죽고 죽이는 보복학살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시체냄새가 몸에 켜켜이 눌러 붙어, 빨랫비누로 씻고 또 씻어내도 가시지 않았다. 고은은 절망했다. 산과 들로 몽유병자처럼 떠돌았다. 빨간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다니거나, 엿장수 노릇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말했다.

“난 삶의 환멸과 허무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1951년 어느 봄날, 군산항 부두에서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일본인 항해사의 눈에 띄어 살아났다. 그 다음엔 양쪽 귀에 청산가리를 부어넣었다가 한쪽 고막이 녹아버렸다. 1963년 5월, 목포에서 제주로 가는 배 황령호에서는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목포 유달산에서 내 몸에 매달 돌을 마련했고, 갑판 위에서 ‘최후의 소주’를 마셨다. 적당히 취하면 ‘입수(入水)’할 참이었다. 달이 눈부시게 밝았다. 물결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그런데 마시고 또 마셔도 취하지가 않았다. 문득 ‘뿌우∼’하는 뱃고동소리가 들렸다. 아뿔싸! 배는 이미 제주항에 닿고 있었다. 1970년 북한산 정릉계곡에선 그동안 모아뒀던 수면제를 한 움큼 털어 넣고 잠이 들었다. 일부러 사람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골짜기를 택했다. 그런데도 그날 훈련 중이던 예비군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난 30여 시간 만에 깨어났고, 그 뒤로도 오랫동안 몸을 다스려야 했다.”

고은을 잠시나마 달래준 것은 절집생활이었다. 그는 1952년 일초(一超)라는 법명으로 출가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조계종 초대종정 효봉 스님(1888∼1966)의 제자가 됐다. 경남 통영 미륵섬 미래사에서 보낸 스승과의 생활은 행복했다. 10여 명의 제자 가운데 맏상좌가 구산 스님(1909∼1983)이었고, 고은이 중간, 그로부터 두세 번째 아래가 무소유로 이름난 법정 스님(1932∼2010)이었다.

“우린 토굴문중이었다. 하루 한 끼 먹으며 철저히 수행중심으로 살았다. 스승은 겸손하고 온화했다. 목소리도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새벽 3시 기상시간만은 추상같았다. 쩌렁쩌렁 맹수소리로 잠을 깨웠다. 날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생일을 기억했다가 국수와 떡도 해줬다. ‘오늘은 국수 먹기 좋은 날’이라며 만들게 하곤, 나중에 ‘네놈 귀빠진 날’이라고 알려줬다. 어느 꽃피는 봄날, 일렁거리는 춘심에 내 젊음이 폭발했다. ‘부처가 되면 뭐 하냐’며 선방의 구들장을 뜯어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러자 스승은 ‘맞다! 그거 돼서 뭐 하냐, 잠이나 자자’며 벌렁 드러누웠다. 한방 크게 얻어맞았다. 난 울면서 구들장을 다시 가져다놓고 잘못을 빌었다.”

“난 시인이 안 됐으면 뭐가 됐을까. 아무짝에도 쓸모없지 않았을까. 시란 원초적인 것이다. 우주의 사투리다. 내 속엔 불이 들어있다. 식지 않은 분화구라고나 할까. 어느 봄날 나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셨던 장모님이 휠체어 타신 채 ‘벚꽃 참 좋구나!’하시며 돌아가셨다. 얼마나 선적이고 시적인가. 난 젊은 날 제주의 파도소리에서 시의 율동을 얻었다. 청춘을 독한 소주와 함께 보냈다. 난 평생 학생이다. 이젠 책이 술이다. 호흡이다. 무질서하게 난독하다가, 미치면 정독한다. 서재는 내 자궁이다. 서재에 있으면 편안하다. 한때 난 포도주를 구정물로 알았다. 그런데 요즘엔 가끔 포도주를 한잔씩 마신다. 오, 좋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13 Comments
파우 2015.01.13 22:23  
고은에게도 심하게 나타났군요. 그런 자멸적 행동. . . 창작의 전단계가 유별납니다. 귀에 청산가리를 넣고요.
리버룸 2015.01.13 22:37  
전후의 살벌함과 피페함을 도저히 못견디겠더라고 예전에 종로서적에서 마련한 만남의 시간에 말했었습니다. 독자중에 한청년이 함석헌선생을 부도덕하다고 비난하자 고은선생이 짓던 하얀 웃음이 기억나는군요..
비공개 2015.01.14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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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15.01.14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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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15.01.14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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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15.01.1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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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15.01.15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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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15.01.16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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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15.01.1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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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15.01.1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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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15.01.18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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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15.01.1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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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15.01.18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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