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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이란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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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의 아버지’ 찰스 다윈(1809∼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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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진화 창시자 찰스 다윈의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인 해다. 다윈의 진화론은 정치 사회 경제 의학 등에 접목돼 새로운 이론으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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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의 아버지’ 찰스 다윈(1809∼1882)은 아이작 뉴턴,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함께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3대(大) 과학자로 손꼽힌다. DNA의 이중(二重)나선 모델을 발견해 노벨상(1962년)을 받은 제임스 웟슨은 다윈을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내 어머니보다 더 중요하다. 그가 없었다면 생명과 존재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다윈이 150년 전 『종(種)의 기원』을 출판한 뒤 진화론은 다양한 집단의 공격 대상이었다. 특히 성경의 ‘창세기’ 신화를 통째로 부인당한 기독교 쪽에선 “천지만물을 창조한 하느님과 교회를 욕되게 했다”는 시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9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종교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다윈은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1년 대통령에 당선되자 노예해방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두 사람은 직접 만나지 않았지만 노예해방과 진화론을 통해 시대정신을 교감했다. 링컨이 ‘인간 평등’을 주창했다면 다윈은 ‘생명 평등’을 제기했다. 인간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진화의 긴 역사에서 나온 산물임을 증명했다. 다윈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1832년 브라질에서 여자 노예를 채찍으로 때리는 장면을 목격하곤 “두 번 다시 이런 노예의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말했다.

다윈이 위대한 과학자가 된 다섯 가지 요인을 짚어본다.

한 우물을 파다

다윈은 ‘몰입’의 대가였다. 그는 『종의 기원』을 쓰기에 앞서 37세부터 8년간 바다 갑각류 중 하나인 따개비를 조사하고 분류했다. 무려 1만 개의 서로 다른 변이들을 연구하고 기록했다. 부유한 ‘의사 집안’에서 자란 다윈은 아버지의 권유로 에든버러 대학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는 의사의 길을 일찌감치 포기한 채 박물학을 더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그리스어·라틴어 시를 암송하기보다 곤충·새 관찰에 흥미를 가졌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포코크란테’(한눈만 파는 아이)였다. 아버지(로버트 다윈)는 15세의 다윈이 사냥에 탐닉하자 이렇게 책망했다. “너는 사냥과 개, 쥐 잡기 외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구나. 결국 너는 네 자신과 가족 모두에게 수치가 되고 말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성직자로 만들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을 다니게 했다.

그러나 다윈은 대학에서 자연사(自然史)를 평생의 학문으로 선택했다. 화학·식물학·지질학을 공부하고 영국 해군 측량선 비글호를 타고 4년9개월간 남미·태평양 등을 항해했다. 영국으로 돌아와 『비글호 항해기』를 출판한 뒤 18년 동안 진화론을 입증할 증거와 자료들을 축적했다. 대학자의 명성을 쌓은 뒤에도 학문에 대한 몰입은 계속됐다. 1878∼79년 그는 덩굴식물에 대한 연구를 확대해 『식물의 운동성』(글 400쪽, 그림 200쪽)이라는 방대한 책을 완성했다.

말년에는 벌레를 연구하느라 스스로 ‘벌레의 영혼’을 가질 만큼 몰입했다. 『벌레의 습관과 행동을 통한 옥토 형성』은 다윈이 일곱 살에 가졌을 경이감을 죽을 때까지 유지했음을 말해주는 작품이다. 그는 40여 년간 병명도 모른 채 몸이 쇠약해지는 끔찍한 병을 안고 살았다. 아들과 딸을 잃는 고통도 겪었다. 하지만 그는 2~3년에 한 번 새 저서를 내놓는 정열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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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과 탐험 정신

다윈은 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걸 즐겼다. 도전과 탐험은 진화론의 모태였다. 대학 졸업 전 그는 테네리페 섬(모로코 근해 카나리아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을 원정할 계획을 세웠으나 선박 사정이 나빠 포기했다. 그 대신 북웨일스 지방의 거칠고 황량한 산악 지역을 누비고 다니면서 지질학의 실전 경험을 쌓았다.

다윈의 최대 모험은 지구를 한 바퀴 돈 ‘비글호 항해’였다. 그는 바다에서 18개월을 지내면서 6400㎞를 항해했다. 말을 타고 3200㎞ 이상을 달렸다. 22세의 부잣집 청년이 좁은 선실에서 극심한 뱃멀미와 싸우면서 신대륙에 대한 ‘도전 정신’을 불태운 것이다. 『왜 다윈이 중요한가』를 쓴 마이클 셔머는 2004년 6월 다윈의 발자취를 되짚기 위해 한 달간 갈라파고스 제도를 탐사했다. 셔머는 산크리스토발 섬의 황량하고 메마른 용암 지대에서 육체적으로 고된 경험을 겪은 뒤 “찰스 다윈은 명민한 과학자였을 뿐 아니라 강인한 탐험가였다”고 말했다.

비글호 모험을 끝낸 다윈은 종의 영속성을 의심한다.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섬 주민들이 코끼리거북의 몸의 형태, 등딱지의 모양·크기를 보고 단번에 어느 섬에서 왔는지 알아맞혔기 때문이다. 새·여우들의 변종 현상도 ‘창조론’을 무너뜨렸다. 그는 1832년 브라질 밀림지대를 탐험하고 1835년 세인트 카를로스 만에서 화산 폭발과 수백 차례의 지진·해일을 목격했다. 다윈의 천재성은 그런 현장 속에서 발휘됐다.

생태학 개척한 학문 융합

다윈은 자연사를 공부했지만 생물학·지질학·동물학을 아우르는 생태학의 새 영역을 개척했다. 그 원동력은 끊임없는 독서와 관찰이었다. 대학 시절 읽은 토머스 맬서스의『인구론』은 생존 경쟁을 위한 진화 개념의 단초를 제공했다. ‘자연선택’ ‘적자생존’ 같은 단어들이 만들어졌다. 다윈은 갈라파고스의 생태계에서 종(種)들이 생존을 위해 정교하고 다양하게 적응하는 현장을 발견했다. 탐험가 알렉산더 폰 훔볼트가 쓴『남아메리카 여행기』는 비글호 항해 참가를 추동하는 동력을 제공했다. 천문학자 존 허셜의 『자연철학 연구에 대한 기초 논문』,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 역시 진화론의 자양분을 제공했다.

그는 관찰의 대가였다. 브라질에서 코끼리·말 화석이 지질연대에 따라 다른 것을 발견하고 생물 진화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나이 들어선 야생 난의 아름다움에 취해 난초의 번식을 연구하고 병실에 누워 오이씨와 덩굴식물의 변이를 관찰했다. 그는 『종의 기원』을 발간한 지 7년 뒤 『인간이 사육한 동식물의 변이』를 출판함으로써 진화론의 두 번째 기둥을 세웠다.

경쟁자와 敵을 관리하다

다윈 시대엔 ‘존재의 대 사슬’이란 개념이 유행했다. 세계는 복잡하고 차원 높은 순서로 창조됐고, 가장 고귀한 자리에 인간이 있다는 논리였다. 가장 높은 자리는 ‘문명화된 백인 남성’의 차지였다. 하지만 다윈은 나무에 가까운 도표로 진화를 설명했다. 인간은 무수히 많은 생물체와 똑같이 나무 가지 중 하나를 차지할 뿐이다. 다윈은 스스로를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라고 생각했다.

다윈은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진화론을 발견한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를 린네 학회에서 진화론의 ‘공동 발표자’로 내세웠다. 월리스가 다윈에게 보낸 짤막한 편지와 논문은 자신이 20여 년간 구상하던 『종의 기원』을 출간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진화론 발표 이후 다윈의 오랜 친구들은 등을 돌렸다. 영국의 유명작가 칼라일은 “사람을 원숭이의 친척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비글호 선장이자 오랜 친구였던 피츠로이는 “성서의 진리에 어긋나는 괘씸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거역하는 못된 궤변”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다윈은 대립과 갈등을 싫어했다. 찬반 양론이 격돌할 때마다 다윈은 지지자들이 자신을 대신해 토론장에서 싸우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렇다고 다윈이 무책임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진화론을 입증하는 저작들을 잇따라 내놓았다. 사랑하는 아내의 독실한 신앙심을 배려해 ‘인간 진화’는 맨 나중에 발표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진화론 때문에 등을 돌린 친구에겐 친분을 복원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연구 공유 네트워크
다윈은 연구 활동을 위해 보이지 않는 자원과 인맥을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1846년 10월 따개비 연구를 시작했을 때 세계 각지의 과학자들에게 관련 자료를 의뢰하는 편지를 썼다. 그러자 다윈의 집 앞에는 각종 희귀한 샘플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재배 식물의 변이에 관해 의문이 있으면 정원사나 농부에게 질문을 던졌다. 야생동물에 대해선 사냥꾼이나 개 주인에게까지 질문을 퍼부었다.

비글호 탐험 기간 중 그는 런던의 친구들과 공유 네트워크를 가동했다. 그런 네트워크 덕택에 비글호 항해를 끝내면서 그는 동물학·지질학과 관련한 1700페이지의 기록, 4000개의 동물 가죽·뼈, 알코올 병에 보관한 1500개의 표본을 건졌다. 진화론을 둘러싼 대치 전선에선 찰스 라이엘(지질학자), 토머스 헉슬리(생물학자) 같은 원군이 활약했다. 그 결과 헉슬리는 ‘다윈의 불독’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이양수 | 제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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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은 후 생물학자 T H 헉슬리는 이렇게 토로했다고 한다. 다윈은 지구상의 모든 종이 하나의 조상에서 시작해 오랫동안 진화해 왔다고 주장했다. 살아 있는 피조물은 자연선택의 결과라는 생각은 창조론을 바탕으로 한 세계관을 일거에 뒤엎는 것이었다. 미국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자연선택은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최고 개념”이라고 말했다.

다윈이 진화론에 대한 영감을 얻었던 것은 알려진 대로 1831년부터 영국 해군 측량선 비글호를 타고 항해하면서였다. 비글호를 타고 동태평양 적도 부근 갈라파고스 제도()를 방문했을 때 그는 방울새(핀치)의 부리가 다양하고 그 섬의 자원을 활용하기에 가장 알맞도록 적응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떤 섬에 사는 핀치의 부리는 단단한 견과를 깰 수 있도록 짧고 강했지만 다른 섬에 사는 핀치의 부리는 틈새에 끼어 있는 먹이를 파먹을 수 있도록 길고 가늘었다. 이는 누구나 관찰할 수 있는 일이지만 다윈의 위대함은 새들이 그렇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연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한 점이다.

어린 시절의 다윈은 성적이 나빠 의사인 아버지를 어지간히 괴롭혔다. “사냥과 개, 쥐잡기에만 빠져 있으면, 너 자신은 물론이고 집안에 부끄러운 사람이 될 게다.” 그는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동물만 쫓아다녔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에든버러의과대학에 진학했지만 적성에 안 맞아 법학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었다. 하지만 동물에 대한 관심은 그대로였다. 목사가 창조론을 부인하는 진화론을 정립했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일생 동안 주된 즐거움과 유일한 일은 과학 작업이었다.”(다윈)
다윈은 12∼22세에 새알을 모았고, 식물채집과 지질답사를 했으며 사격과 박제술을 익혔다. 불빛을 비추거나 음악을 들려주면서 지렁이의 반응을 관찰했고, 딱정벌레를 수집했다.


▷2009년은 다윈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앞두고 ‘진화론의 모든 것’에 관한 특별전시회가 지난주 개장한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열리고 있다. 다윈이 갈라파고스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종류인 메가테리움(포유류인 나무늘보의 조상) 화석 등 진귀한 전시물이 가득하다. 직접 보면 몸길이 4∼6m의 크기에 압도된다. 모든 생물은 유전자로 이어져 있으며 진화의 마지막 단계인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도 깨닫게 된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다윈 패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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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식물학자-아버지는 의사… 진화론은 ‘가문의 힘’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그의 가문 내력과도 무관치 않다.

다윈은 영국 링컨셔의 이름난 학자 집안 출신이었다. 증조부
로버트는 지역 명망가였고 그의 장남 로버트 워링은 ‘식물학요론’이라는 책을 펴낸 식물학자였다. ‘식물원’과 ‘주노미아(Zoonomia·동물생리학)’ 등의 저서를 남긴 4남 에라스무스가 다윈의 할아버지.

특히 에라스무스 다윈은 손자 찰스의 진화론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후대에 ‘다윈의 할아버지’로 더 알려졌지만 18세기 영국 중부지역에서 유명한 외과 의사이자 시인, 식물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살아있는 모든 생물이 태초의 미생물로부터 점차 발전돼 왔다’고 주장했다. 태초에 바닷속에 생겨난 필라멘트처럼 가는 실 모양의 생명체가 오랜 기간을 거쳐 복잡한 생물이 됐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매우 독창적인 것이었다.

에라스무스의 막내아들이 다윈의 아버지 로버트다. 아버지의 공상적 기질에 비판적이었던 로버트 다윈은 식물학 등 다른 분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의사 일에만 전념해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의대 공부를 중도에 그만두고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걸은 다윈은 말년에 아들들과 공동연구를 했다. 그는 1880년 ‘식물의 운동력’을 출간하며 물리학자인 둘째 아들 조지와 식물학자인 셋째 아들 프랜시스를 참여시켰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우리 할아버지는…” 다윈 고손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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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동아 1월호

다윈의 손녀딸이자 내 외할머니인 노라 발로는 95세이던 어느 날, 내게 다윈의 삶을 이야기해 줬어요. 그리고 그의 진화론이 무엇인지도 들려줬지요.”

영국의 시인이며
런던동물학회 회원인 루스 페이덜(62) 씨는 지난달
24일 과학동아와 가진 e메일 인터뷰에서 다윈에 관한 가족사적 얘기를 찬찬히 전해줬다.

페이덜 씨에 따르면 다윈은 정직하고 성실하며 친절하고 자상한 성격이었다. 자식에게는 다정한 아버지이자 아내에게는 둘도 없는 남편이었다. 옳다고 생각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붙잡고 연구하는 고집스러운 학자이기도 했다.

“‘종의 기원’이 출간됐을 때 다윈 할아버지의 셋째 아이가 죽었어요. 환경에 가장 적합한 개체만 살아남는다는 자신의 자연선택설을 자식의 죽음에서도 느낀 셈이죠.”

그러나 신앙심이 깊었던 다윈의 부인
에마는 달랐다. 페이덜 씨는 “에마에게 인간의 죽음과 종의 멸종은 사후() 세계의 시작이었다”며 진화론에 대한 다윈과 에마의 시각차를 설명했다. 그녀는 다윈의 일기와 편지에서 드러난 진화론과 그에 따른 갈등을 시로 구성한 책 ‘다윈: 시로 보는 일생’을 내년 2월 12일 영국에서 출간할 예정이다.

2009년 다윈 탄생 200주년과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을 맞아 과학동아 1월호는 페이덜 씨를 비롯해 ‘다윈의 위험한 생각’으로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과학철학자 대니얼 데넷, ‘21세기판 비글호’를 건조 중인 영국의 피터 맥그로스 씨 등을 인터뷰했다. 또 다윈의 진화론이 인문학, 사회과학 등 세상 전반에 미친 영향을 분석해 신년 특집으로 소개했다.

이현경 동아사이언스 기자 uneasy75@donga.com
중앙 선데이 포커스, 동아일보

 

6 Comments
sang1026 2009.01.09 00:36  
다윈에 대해선 막연히 알고 관심도 갖지않았는데, 노예해방도지지하고, 어린시절 등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파우 2009.01.09 01:30  
다윈공부가 필요한데 좋은 자료 보여주십니다[품슴] 40여년간 앓았던 병이란 뭔지요?[픔슴]
리버룸 2009.01.09 11:09  
동감입니다. 갈라파고스를 포스팅 하려다가 다윈이란 인물이 궁금해졌습니다.^^
리버룸 2009.01.09 11:10  
파우님께서 알아봐 주세요. 유전적 질환일지....연구 공부하다 걸린 위장병, 디스크일지...
Charles Garnier 2015.09.10 13:35  
다윈 씨, he's got a way with words - natural selection, etc.  DNA나 더블 힐릭스, 크로모솜에 관해서 전혀 몰랐어도 말 장난 가지고 진리에 근접했었어요.  전문가에게 물어봤는데 세균에 관한 구절들은 잘못된 추정이었기 때문에 읽다가 skip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사회과학 쪽으로 허버트 스펜서가 발전시켜서 서양 제국 주의의 핵심 사상이 되었지요.  구한말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의 커존경(영국 외상, 인도 총독)이 열렬한 추종자였지요.  결국 영국은 natural selection의 승자를 일본으로 인정하고... 다윈, 한국하고 인연이 깊은 과학자입니다.
리버룸 2015.09.10 19:36  
흐~ 영국사람들은 일본사람 좋아해서 편 많이 들었지요...러일전쟁때도 발틱함대가 빨리 못가도록 겐세이..진을 빼버려 일본에 폭삭 지게 만들어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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