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유물전시관 - 윤두서상. 유화백마도. 미인도. 고산유고.유물
전체 면적 1830m²(약 550평)에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의 유물전시관은 전통한옥과 현대건축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구조물로 2010년 10월 준공됐다. 자연 채광과 외부 조명을 최대한 살려
고산의 삶과 문화예술을 아름다운 전통한옥으로 구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지하 전시관과
지상 전통한옥을 이어주는 매개 공간으로 아트리움을 도입한 것과 전시관 동선 배치의 마지막을
녹우당으로 자연스럽게 연계해 조화를 이룬 것도 건축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동아일보 기사)
윗층에서 내려다 본 아래층 공간
생각없이 갔다가 뜻밖에 대형 미인도를 만났습니다.
엘리베이터 기둥 윗부분에 부조되어 있었어요.
1989년에 도난당하여 일본에 밀매되기 직전 절도범이 붙잡혀
해남 윤씨 종가로 돌아왔다는 뉴스의 그 작품입니다.
커다란 가채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는듯하고, 저고리는 짧아서 겨드랑이 속살이
드러나는듯 하며, 치마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합니다.
이 그림은 윤두서의 후손이 1982년 녹우당 소장품들 속에서 발견했는데,
작자 미상으로 발표됐었습니다. 1998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한국관 개관
작품으로 걸리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출장 중인지, 이번 전시장에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공재 윤두서 연보
공재 나이 41세에 본 손자, 청고 윤용... 그의 靑皐實記에 미인도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어서 당시 사회 분위기로 봐서 사대부집안에서 미녀 그림을 그리기 어려운
때라 낙관을 찍지 못했음을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복의 형상으로 봐서
18세기 말~ 19세기 초 라는 의견도 있어서 윤용의 그림이 아닐 것이라는
추정도 있습니다.(이태호 명지대 교수. 일반학계)
윤두서 자화상. 국보 제 240호
80년대초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처음 본후, 잊혀지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파격적인 얼굴이었습니다.
사람들과 학계에선 ...미스테리 자화상. 왜 머리만 있는가? 라는
물음이 있어 왔습니다.
그의 눈매는 형형 강렬하여, 두렵기만 합니다. 자기 존엄감이 강한 얼굴...
작년인가 KBS 역사스페셜에서 그의 그림 탐구편을 봤습니다.
그는 당쟁사회에서 등용되기 어려운 남인 가문의 사람으로 울분과, 22세부터
아내, 부모, 친한 친구의 죽음을 겪어 슬픔과 스트레스로 인해 30세에 이미 반백이
되었다는 사실... 그의 얼굴에 깃든 비장미도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표구도 하지 않은 낱장 그림으로 녹우당에 전해내려온 점....원래는 귀도 있었고
옷도 있었고, 쥐수염 붓으로 한올한올 수염을 그렸다고 합니다.
얼굴의 옛말은 얼골... '얼을 담은 골'..얼굴에는 얼이 담겨있어야 함.
옛사람들의 초상화 핵심은 ‘전신사조(傳神寫照)' 였다고 합니다.
실제의 형상을 그대로 묘사함은 물론 神..즉 정신까지 담아내는 것..
유하 백마도(柳下白馬圖)
말을 좋아해서 말그림들을 남겼지만, 그는 결코 말을 타지 않았으며,
하인들에게도 하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역사스페셜을 통해 알게됐습니다.
공재는 모든 인간이나 동식물을 그릴때 종일 관찰한 뒤에야 비로소 그려 그의 그림은
사실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정신의 표현까지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버드나무 가는 줄기는 미풍에 흔들리며, 순한 눈매의 백마는
잘 양육된 것 같고 뒷다리 한쪽을 살풋 들고 때를 기다리는 듯 합니다.
고산의 12세손인 윤정현의 부인 광주이씨 이상래(1882-1971) 종부의 규방가사
근현대의 갈림길에 살았던 종부 이상래는 한국전쟁기간에는 집안에 내려오는
문서와 유물을 벽장과 항아리에 숨기며, 많은 수고와 공헌을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