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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왕실 족보 “비타쓰왕은 백제 왕족” 백제 성왕 자손이 아스카 문화 꽃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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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일본 왕실 혈연 실체 발굴
日왕실 족보 “비타쓰왕은 백제 왕족” 백제 성왕 자손이 아스카 문화 꽃피웠다
 
                                                                 홍윤기 한국외국어대 교수·일본문화 senshyu@naver.com
 
아키히토 일왕 “제50대 간무 천황의 생모는 무령왕 후손” 일본 학자 “비타쓰왕 친손자, ‘百濟天皇’으로 불려” 일본 고대 지도, 현 오사카 지역 ‘百濟洲’로 표기 일본 학자 “백제 성왕은 일본 긴메이왕 겸임했다” “일본 최초 여제 스이코 여왕은 백제 성왕의 딸” “게이타이왕은 무령왕의 친동생” 
우에다 마사키 박사는 교토대 사학과 명예교수로 일본 고대 역사학의 태두로 불린다.
30여 년 전 “백제왕이 백제의 식민지였던 왜의 후왕(侯王)에게 ‘백제 칠지도(七支刀)’를 하사했다”고
밝혀 일본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킨 당사자이기도 하다. 우에다 박사는 당시 집으로 몰려든 일본
국수주의 청년들로부터 협박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우에다 박사가 자택에서 필자에게 보여준 것은 훨씬 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집안에서 조상 대대로 고이 간직해온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을 꺼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제30대 비타쓰왕은 백제 왕족입니다.” 

서기 815년 일본 왕실이 편찬한 ‘신찬성씨록’은 일본 고대의 왕도(王都)였던 ‘헤이안경’(지금의 교토시)의 왕족과 귀족 1182개 가문의 신분을 기록한, 일종의 일본 고대 왕족 및 귀족 족보다. 우에다 박사는 일본 왕족 30개 가문이 나열되어 있는 대목을 펼쳐놓고, 그중 12번째에 씌어진 ‘大原眞人’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大原眞人’이라는 일본 왕족이 누구인지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씌어 있었다. 

‘大原眞人. 出自諡敏達孫百濟王也. 續日本紀合.’ 

(대원진인, 그의 조상은 시호가 비타쓰(敏達)라는 백제 왕족이니라. ‘속일본기’ 기록에도 부합한다.) 

풀이하면, ‘대원진인의 조상이 일본 제30대 비타쓰왕이며, 비타쓰왕은 본래 백제 왕족이다.’ 또한 이 내용이 ‘속일본기’라는 왕실 편찬 역사서(서기 797년)에도 부합한다고까지 적시하고 있다. 우에다 박사는 이 대목이 “비타쓰 천황이 백제 왕족 출신임을 말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순간 필자는 말을 잇지 못했는데, “비타쓰 천황이 백제 왕족”이라는 사실도 놀랍지만, 우에다 박사의 학문적 양심에 가슴이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구다라 천황(百濟天皇)’ 

‘일본서기’(서기 720년, 일본왕실 편찬)에 보면, “제30대 비타쓰 천황(敏達·572~585 재위)은 나라(奈良)에 ‘구다라오이궁(百濟大井宮)’을 지었다”는 대목이 있다. 비타쓰왕이 나라의 백제인 집단 거주지 ‘구다라오이(百濟大井)’에 왕궁을 지었다는 얘기다. 이 기록 또한 비타쓰왕이 백제 왕족 출신임을 방증한다. 그뿐만 아니라 비타쓰왕의 친손자인 제34대 조메이왕(舒明·629∼641 재위)도 나라의 ‘구다라강(百濟川) 옆에 구다라궁(百濟宮)과 구다라노데라(百濟寺)라는 큰 가람을 지었다. 조메이왕이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 ‘구다라노오모가리(百濟大殯)’로 장례를 치렀다’는 내용도 있다. 

일본 학자 마유즈미 히로미치씨는 ‘일본서기’의 조메이왕 대목인 ‘조메이기(舒明紀)’에 대한 주해(註解)에서 “여기서 말하는 빈소는 그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한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백제대빈(百濟大殯)’이란 백제 왕실에서 행한 3년상(喪)을 가리킨다. 백제 제25대 무령왕(501∼523 재위)이 왕도(王都)였던 곰나루(웅진, 공주) 지역에서 ‘백제대빈’을 치렀다는 사실은 1971년 출토된 무령왕의 ‘묘지명’을 통해 입증됐다. 백제 왕실의 성대한 장례 의식을 왜에서 거행했다는 것은 당시 나라 땅을 지배한 백제 왕가의 세력이 절대적이었음을 추찰케 한다. 

한편 일본 고대 사학자인 세이조대 사학과 사에키 아리키요 교수는 비타쓰왕의 친손자인 “조메이 천황은 생전에 ‘구다라 천황(百濟天皇)’이라고 불렸을 것이다”라고 발표한 바 있다.

서기 572년에 등극한 비타쓰왕이 ‘백제대정궁’을 세운 오이(大井)는 어디인가. 지금의 나라현 ‘고료초 구다라(廣陵町 百濟)’라는 게 일본 사학계의 통설이다. 이곳에는 2007년 11월 현재 ‘구다라 우편국(百濟郵便局)’도 영업 중이다. ‘고료초 구다라(百濟)’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백제’라는 행정 지명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두 곳 중 하나다.
 
나머지 한 곳은 교토시 동쪽의 ‘히가시 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東近江市百濟寺町)’다. 이 이름은 일본 최대의 비와코 호수 너머 스즈카산(鈴鹿山) 등성이에 우뚝 서 있는 유서 깊은 사찰에서 비롯됐다. 이 사찰의 이름은 ‘샤카산 햐쿠사이지(百濟寺)’, 일본에서는 ‘百濟寺’를 ‘구다라 데라’라고 하는데 유독 이 사찰만은 ‘百濟寺’의 한자어를 소리 나는 대로 읽어 ‘햐쿠사이지’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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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시 동쪽에 ‘百濟寺’란 사찰이 있다. 일본인들은 ‘햐쿠사이지’라고 발음하지만,
‘백제’라는 행정 지명을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1910년 일제의 조선 침략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각지에 ‘구다라고우리(百濟郡)’ ‘구다라손(百濟村)’ ‘구다라강(百濟川)’ 나아가 ‘구다라대교(百濟大橋)’ ‘구다라평야(百濟平野)’ 같은 행정지명이 널리 쓰였다. 일본 고대 지도인 ‘팔랑화도(八浪華圖)’는 지금의 오사카 지역인 난바(難波·‘나니와’라고도 부름) 일대가 ‘구다라스(百濟洲)’로 불렸음을 보여준다. 이 지도는 서기 1098년(承德 二年)에 처음 그려졌다.
 
지금으로부터 900여 년 전 지도에 표기된 ‘구다라스’ ‘난바지(難波寺)’ ‘구다라리(久太郞里·‘백제리’의 이두식 한자 표기)’ 등은 2007년 현재까지 오사카시내의 지명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당시 ‘구다라고우리(百濟郡)’ 지역은 지금의 오사카 중심 시가지인 히가시나리구(東成區)이다. 1937년에 편찬된 ‘일본고어대사전’은 ‘구다라고우리(くだら こうり)’의 ‘고우리’가 “한국어의 고을에서 파생된 말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오사카 중심지 일대는 한때 행정구역상 ‘기타구다라손(北百濟村)’ ‘미나미구다라손(南百濟村)’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강제 점령한 후, 백제와 관계된 대부분의 일본 지명이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가 지명으로 남아 있는 곳이 두 군데에 불과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두 곳의 지명 또한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길이 없다.

“한국과 혈연이 있습니다” 

일본의 구다라(백제) 불교문화는 6세기 초엽(538), 일본 나라 아스카(飛鳥)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백제계 왕실에서 꽃피기 시작했다. ‘일본서기’는 “백제 제26대 성왕(聖王·523~554 재위)이 일본에 백제 불교를 전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왕은 제27대 위덕왕(554~598 재위)에게 왕위를 넘기고 난 다음에는 아예 아스카로 건너가 긴메이왕(欽明·539~571 재위)으로 군림했다. 성왕은 알려진 것처럼 554년 신라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장남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일본 왕실로 건너갔다. 성왕은 이미 539년 센카왕(宣化王·536∼539 재위)이 서거했을 때부터 백제와 일본을 넘나들며 왜왕을 겸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도 “백제 성왕은 일본왕을 겸임했다”는 연구론을 펼쳤다.

성왕의 선대인 무령왕과 동성왕(479~501 재위)도 모두 백제왕으로 등극하기 전엔 왜 왕실에 살았다. ‘삼국사기’ 같은 우리 역사서엔 이 같은 기록이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동성왕과 무령왕이 각기 일본에서 귀국해 차례차례 백제왕으로 등극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니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백제계 왜 왕실에서 살다 귀국해 백제왕이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성왕이 어떻게 왜왕을 겸임할 수 있었는지 납득할 만하다. 

한 가지 더 밝혀두자면 794년, 일본 왕실에서는 새 왕도가 된 교토에 성왕의 일본왕실사당인 히라노신사(平野神社)를 웅장하게 세웠으며, 현재까지 잘 보존하고 있다. 일본 고대 왕실에서 히라노신사에 제사를 드려온 사실은 10세기 초 제정된 왕실 법도 ‘연희식(延喜式)’에도 실려 있다. 히라노신사는 일본 제50대 간무왕(桓武·781~806 재위)의 칙명으로 헤이안경(지금의 교토시) 새 왕궁의 북쪽에 세워졌다. 

2001년, 아키히토(明仁·1989~ 재위) 현 일왕은 간무왕이 백제인의 후손임을 인정한 바 있다. 

“제50대 간무 천황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의 왕자 순타태자의 직계 후손인 화신립(和新笠) 황태후입니다. 이 사실은 일본 왕실 역사책 ‘속일본기’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한국과 혈연이 있습니다.” 

68회 생일을 맞아 기자회견을 열었을 당시 한 말이다. 천황의 이 같은 발언에 황거(왕궁)를 관장하는 궁내청 고관들이 매우 당황했다는 후문이다. 그 때문인지 일본 언론은 이날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하면서 일왕이 언급한 한국과의 혈연관계 대목은 쏙 빼놓았다. 유일하게 ‘아사히신문’이 일왕의 발언을 기사화했다.
 
성왕의 아들과 딸 


백제-일본 왕실 혈연 실체 발굴

‘팔랑화도’는 수백년 전, 일본 오사카 지역이 ‘구다라스(百濟洲)’라는 지명으로 불렸음을 보여준다.

‘신찬성씨록’이 백제왕족이라고 명기한 비타쓰왕(572~585 재위)은 백제 성왕의 제2왕자다. 성왕의 제1왕자는 백제 제27대 위덕왕이다. 비타쓰왕은 긴메이왕(백제 성왕)이 서거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그와 동시에 최고대신으로 20세의 백제인 귀족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를 등용했다. 교토부립대학 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 교수는 소가노우마코 대신이 백제 제21대 개로왕(455~475 재위)의 신하였던 ‘백제조신 목만치(木滿致)의 5대손’이라고 밝혔다. 

비타쓰왕은 576년 3월, 18세의 가시키야 공주를 왕후로 맞았다. 가시키야 공주는 다름 아닌 왕의 이복동생, 그러니까 성왕의 제2공주였다. 근친결혼을 한 셈이다. 가시키야 공주는 비타쓰왕과의 사이에 2남5녀를 뒀으며, 서기 592년에 일본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제33대 일본왕인 스이코 여왕(推古·592~628 재위)으로 36년간, 아버지가 포교한 백제 불교문화를 눈부시게 꽃피웠다. 이 시기는 일본 역사에서 ‘아스카 문화 시대’(592~645)로 높이 평가받는다. 

14세기 초에 씌어진 일본 불교 왕조사인 ‘부상략기(扶桑略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推古天皇元年正月, 蘇我大臣馬子宿. 依合戰願, 於飛鳥地建法興寺,

立刹柱日 島大臣竝百餘人 皆着百濟服, 觀者悉悅, 以佛舍利, 籠置刹柱礎中.”

588년, 백제 왕실에서 건너온 건축가 태량미태(太良未太), 문가고자(文賈古子) 등에 의해 일본 최초의 칠당 가람이 아스카에 착공됐다. 위 대목은, 스이코 여왕이 등극한 직후인 593년 1월에 소가노우마코 대신과 만조백관이 ‘백제옷’을 입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가운데 백제에서 보내온 부처님 사리함을 찰주의 기초 속에 안치했다는 내용이다. ‘만조백관이 ‘백제복’을 입었다’는 것은 스이코 여왕의 아스카 왕실이 백제계 왕가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당시에 관한 ‘일본서기’ 기록에서는 ‘백제복을 입었다’는 ‘부상략기’의 대목을 발견할 수 없다. 

닌토쿠 왕실로 건너온 백제신(百濟神) 

그러면 이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백제인 왕가가 형성된 시기로 추정되는 4~5세기, ‘난바(오사카)’의 ‘구다라스(百濟洲)’ 시대를 살펴보자. 백제가 일본을 최초로 지배한 것은 오진(應神)왕 때부터라는 게 통설이다. 이 사실을 고증하는 자료 중 하나인 오진천황 전신 초상화를 보면, 도포를 입은 천황이 머리에 남바위를 쓰고 있다. 남바위는 가죽을 댄 기다란 모자로, 우리 조상들이 겨울철 방한모로 착용해왔다. 

당대의 오진왕과 그의 제4왕자 닌토쿠(仁德)왕이 백제인이었음을 일본 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일본서기’는 백제의 학자 왕인이 오진왕의 초청을 받고 왜 왕실로 건너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인은 오진왕의 제4왕자 오사사기 왕자에게 글을 가르쳤다. 오진왕이 서거한 뒤 3년째 되던 해에는 왕인이 오사사기 왕자를 닌토쿠왕 지위에 올려놓았다. 이 같은 사실은 805년에 씌어진 고대 문헌에 기록돼 있다. “왕인이 어대에 와카(和歌) ‘나니와쓰노우타(難波津歌)’를 지어 닌토쿠 천황을 왕위에 천거하였다.”(紀貫之 ‘古今集’) 오사카의 고대 나루터 이름인 ‘나니와쓰’는 왕인이 지은 와카에서 유래했다. 이 지명은 현 오사카 중심의 번화가인 ‘나니와(難波)’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또 주목할 것은 “닌토쿠 천황이 모국 백제로부터 백제신(百濟神)의 신주를 왕실로 모셔왔다”(‘風土記’ 8~10C 편찬)는 점이다. “백제신의 신주를 모셔왔다”는 것은 조상신을 숭경하는 종묘사직 신앙행위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며, 이는 곧 닌토쿠왕이 백제인임을 입증한다. 닌토쿠왕과 그의 부왕 오진왕이 백제인이라고 주장한 사학자는 한둘이 아니다.

와세다대 사학과 미즈노 유 교수는 일찍이 “오진 천황과 그의 아들 닌토쿠 천황은 구다라국(백제국) 왕가로부터 건너와 일본 정복왕조를 이루었다”(1978)고 단정한 바 있다. 도쿄대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 교수도 이보다 앞서 “백제 사신으로부터 칠지도(七支刀)를 전해 받은 왜왕 오진 천황은 구다라(백제) 왕족이며, 천황씨(天皇氏) 자체가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일본 이주자였다”(1960)고 밝혔다. 

일본 고대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의 저서 ‘구다라에서 건너온 오진 천황’(2001) 또한 일본 사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오사카부 하비키노시에 있는 “오진릉(應神陵)에 매장된 시신은 5세기 후반에 건너온 구다라의 곤지왕자(昆支王子)이다. 그는 5세기말에 일본에서 구다라계 왕조(百濟系王朝)를 수립했다”고 주장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곤지왕자는 백제 제21대 개로왕(455~475 재위)의 제2왕자다. 이처럼 한일 고대사를 성실하게 연구하고 그 결과를 양심적으로 밝힌 일본 사학자들은 반한(反韓) 세력으로부터 정신적 박해를 받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신동아. 2008.4월호>
 
 
 
2 Comments
파우 2016.10.10 11:57  
2008년 자료이군요. 1980년대초 비류백제 얘기 본 후 오래만인 듯합니다. 담
리버룸 2016.10.10 20:05  
예, 공주 무령왕 포스팅하면서 찾아보다가...옛날 최인호씨가 연재소설 썼던 게 칠지도와 거울로 맞아들어가는 얘기, 덴무천황까지 맞아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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